1.
요즘은 주말마다 미팅이 있다. 주로 일요일 점심시간에 교회 근처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데, 평일에 사무실에서 나누지 못할 이야기가 늘어간다. 민감한 사안들, 개인적으로 곤란을 겪거나 내가 한국인이기 때문에 도움이 필요한 경우가 그것이다. 필리핀에 체류한 지 일 년 반이 되어가는데 아직 새로운 누군가를 만나고 대화할 영역이 넓어진다. 얇고 넓게 퍼지는 인적그물 안에 누군가 나를 찾아주는 것이 고마워 주말임에도 기꺼이 시간을 낸다. 이제는 아내와 아이도 쉼 없이 일하는 주재원의 일상을 받아들인 것 같다.
2.
함께 공부하는 대학원 학생들도 나의 이런 사정을 어느 정도 받아들인 것 같다. 필리핀어로 토론하는 자리에 내가 끼는 게 혹 방해되는 것은 아니냐는 궁색한 변명을 늘어놓으며 조별 과제와 발표, 중간고사를 치르느라 10월이 지났다. 하루는 미안한 마음에 수업시간에 피자를 돌리고 카풀하는 학생에게 커피상품권을 선물했다. 박사과정임에도 전공과목에 대한 이해와 활용이 부족한데, 필리핀 대학을 경험하는 것 자체에 의미를 둔다는 안일한 마음이 학업을 소홀하게 한다. 이러다 중도탈락하는 것은 아닐지 걱정된다.
3.
또 다른 걱정은 건강이다. 참을성이 줄어들고 쉽게 피곤해지는 것이 지난 일 년 운동을 게을리한 성적표로 드러났다. 10월부터 점심식사 후에 걷는 습관을 들이기 시작했다. 사무실 근처 레가스피 공원을 한 바퀴 돌고 나면 괜스레 필리핀 생활에 감사하는 마음이 생긴다. 콘도에 수영장과 체육관도 있고, 필요할 때 계단으로 36층까지 올라올 수 있는 맨몸 운동장이 있으니 다시 움직이기 시작할 때다. 건강은 무언가를 위한 조건이 아니라 그 자체로 중요한 목표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몸을 움직이기까지 몇 달이 걸렸다.
4.
한편 나는 종종 타지로 떠나는 일일 선교사, 주일 예배 드럼 연주자이자 청년들의 멘토로서 살기 시작했다. 별다른 기술도 출중한 역량도 없고, 훌륭한 모범이 아님에도 그곳에 자리한다는 것은 계획하거나 기대한 일이 아님에도 내게 주어졌다. 무엇을 남길 것인가라는 질문으로 가득한 파견생활에서, 그 자체로 목적이 이끄는 삶을 경험한다. 언제 복귀하고 어떤 성과가 있느냐는 정량적인 목표에서 한 발 벗어나 나와 삶의 호흡을 찾아 어느 자리건 묵묵히 살아내는 힘을 키우며, 필리핀 생활 1년 6개월 차를 맞이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