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스물 여덟이 되서 다시 태권도장을 찾았다. 아련한 향수같기도 하고 못다이룬 꿈같기도 한 추억의 실타래를 감아 올리면서 결심한 일이었다. 어린 시절 '너는 앞으로 뭐할래?'라는 어른들의 물음에 '저는 태권도 국가대표가 되서 시드니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딸거에요.'라고 당차게 말하던 기억이 새록 솟아났다. 물론 누가 그때 그 말을 기대하거나 기억하는 지 모르겠지만, 모든 것은 내 세상을 사는 나의 문제니까.
사진첩을 뒤적이다 처음 태권도장에 가던 날 찍은 사진을 찾았다. 1991년 5월. 빗바랜 사진도 벌써 스무살이 되어가는데 사진속에서나 거울앞에서나 나는 아직도 여덟살인 것 같았다.
다음날 도장에 등록은 했는데 막상 무엇을 목표로 운동을 해야할 지 모르겠어서 한동안 가만히 앉아있었다. 도장을 가득 메운 초등학생쯤 되어보이는 아이들이 신기한듯이 나를 멀뚱멀뚱 쳐다봤다. 어디보자. 군시절 만들었던 태권도 품세 동아리가 한 번도 다른 사람 앞에서 실력을 내보일 기회도 없이 전역했던게 생각나고, 요즘 뉴욕에서 태권도 사범으로 일한다는 지인이 떠올랐다.
또 요즘은 해외봉사활동도 특기가 있어야한다는 말이 귓속을 맴돌면서 혼자 생각에 빠져있는데 또 일을 키우는 건 아닌가 싶어 4단 심사를 보는 걸로 결론을 냈다.
군대에서 심사를 한 번 봤으나 떨어졌으니 이번이 재수인 셈이다. 4단은 고단자가 아니지만 심사는 일년에 네 번밖에 안본다. 다행히도 다음달에 심사 일정이 잡혀있어 바싹 달려들 목표가 생겼다. 아무리 어릴 때 태권도를 했다고 한들 한 달만에 심사를 봐서 단증을 딴다는 건 자격증을 사는 것이라고 할 지 모르겠지만, 군대에서까지 태권도 동아리를 만들 만큼 관심의 끈을 놓지 않고 기다린 내게는 일종의 기회였다. 태극 1장부터 태백까지 왔다갔다 하는 품세를 외우고, 뻣뻣한 다리를 찟는 노력이 가상치 않은가. 아무튼 도장의 모든 아이들을 사범으로 삼아 따라다녔는데 귀찮아하는 기색도 없이 오히려 방글방글 웃으며 가르쳐준 아이들이 고마웠다.
4단 심사부터는 논문을 쓴다. 내 심사의 주제는 <현대사회의 저출산․고령화 문제 등 태권도장 경영환경 급변에 대한 태권도계의 대응방안>이었는데, 며칠을 끙끙앓다고서야 마감일 새벽에 제출할 수 있었다. 그나마 심사 당일에 했던 겨루기 보단 쉬웠는데, 내 겨루기 상대는 30대 현직 군인으로 내 다리에 2주 동안 지워지지 않는 멍을 남겨주었다. 열심히 한 보람이 있는지 강원도에서 심사를 본 스무명 중에 나를 포함한 네 명이 승단했다.
두 달을 기다려 단증을 받았다. 15년이나 지난 시간동안 모양은 조금 변했지만 틀림없는 단증이렸다. 세계 대회에서 받은 메달이 아니더라도, 외국 어딘가로 나갈 수 있는 자격증이 아니더라도 나를 뿌듯하게 해준 태권도 단증이렸다. 오랜만에 계획한 일이 이루어져 기분이 좋다. 대단치 않은 일이라도 자기가 계획한 일을 이룰 때 새롭게 시작할 힘을 얻는가보다.
태권도장을 찾은 건 나의 자존감을 찾기 위한 여정의 첫번째 목적지였다. 그 때의 꿈도 지금은 지나간 추억이지만 그 기억을 되살려 어느 모양으로든 꿈을 이루었을 때, 나는 무엇이든 할 수 있겠다는 힘이 생긴다. 이제 유도와 검도가 남은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