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양복바지를 입었는데 벨트가 헐렁하다. 빠듯했던 세 번째 홈으로 자연스럽게 핀이 고정된다. 분명 어제 달린 하프마라톤 때문이다. 달리기가 내 몸과 일상을 바꿔놓고 있다. 몸무게가 줄었고 잠자리에 드는 시간이 빨라졌고 먹고 마시는 양이 줄어들었다. 달리고 나면 유독 말의 톤은 높아지고 감정이 날뛰지 않는다. 일상이 여러모로 나아지고 있다.
2.
필요가 변하니 관심사도 변한다. 명품 시계만 바라다 스마트와치를, 달리기 좋은 옷과 신발을 찾게 된다. 출장에 조깅화를 챙겨 넣고 일과 전에 달리는 습관도 새롭다. 일본, 필리핀, 인도네시아에서 조깅한 날들이 기억에 남는다. 형형 색색의 주자들이 모인 마라톤 대회에선 지난여름 아내가 사준 바지와 집에 있던 등산 양말을 신고 가볍게 달렸다.
3.
달리다 문득 내가 낸 참가비를 무엇으로 보상받는지 궁금해졌다. 자동차들의 전유물인 도로를 점령해 보는 것, 여러 사람이 모인 들썩이는 무리의 일원이 되어 보는 것, 누군가의 우렁찬 목소리로 고독한 나의 달리기를 응원받는 것, 몇 달 앞서 운동하고 나를 더 멀리 더 빠르게 움직이게 만드는 것과 비교하니 참가비 몇 만 원이 아깝지 않았다.
4.
이번 대회는 꾸준히 내 속도로 달린 깔끔한 운동회였다. 나만의 페이스를 고집하느라 종종 뒤에서 치였지만, 방해받지 않고 오히려 응원받으며 생애 최장거리를 달려볼 기회였다. 맑은 하늘과 높은 건물들, 서강대교 위에서 바라본 한강과 서울풍경에 눈길을 빼앗겨 달리는 내내 숨도 차지 않았던, 오르막에서 오히려 힘이 났던 첫 경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