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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S, 20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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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새 잠을 설치고 새벽같이 일어났다. 먹은 것도 없는데 얼굴도 잔뜩 붓고 목도 칼칼해 아침부터 불안했다.

시험장으로 향하면서 잠시 학원에 들렀다. 전날 들어온 정보도 얻고 간단한 요령도 배울 겸 들어선김에 지금까지 배운 뉴스로 발성연습을 하고 장음을 외었다. 공복에 소리가 더 잘 나온다는 말에 아무것도 안먹었지만, 내 차례는 오후 2시였기 때문에 뱃심이 떨어지진 않을까, 목이 쉬진 않을까 걱정하며 발성연습을 적당히 했다. 그래도 선생님들이 계서서 새로산 넥타이와 내 손으로 다듬은 머리모양을 검사받았는데, 이미 손보긴 늦어 머리를 꾸미는 것은 물론 메이크업도 없이 시험장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동기와 만나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며 함께 시험장에 도착했다. 난생 처음보는 대형 방송사를 홀로 찾아갔다면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부터 가슴이 떨렸을텐데, 그동안 함께 준비했던 친구같은 동기와 함께 대화하며 들어선 것 자체가 심리적 안정을 주었다. 한참을 떠들어서 목에 부담이 왔는데 정작 시험엔 아무 영향을 안준것 같다. 물을 몇모금 마시니 목소리는 금방 돌아왔다. 

남자는 수험번호가 500번까지 있었다. 당연히 지원자는 500명이었겠지만, 시험 당일 열명씩 짝지어 테스트를 할 때 한두명은 기본이요, 심지어 세네명씩도 공석이 생기는 걸 보니 적어도 100명은 시험을 포기한 듯하다. 그래도 큰 강당을 가득메운 수백명의 지원자들은 하나같이 깔끔하고 소리가 정갈했는데, 면면을 살펴보니 더러는 여유있는 모습이었지만 대부분 무표정으로 긴장감을 나타내고 있었다. 

현직에 있는 사람들끼리 명함을 주고받는 모습도 종종 눈에 띄었는데, 그도그럴것이 방송지망생들이 가장 선호하는 SBS에서 3년 만에 신입아나운서를 공개채용하는 자리였기 때문이다. 사방팔방에서 내뿜는 분위기가 나를 긴장시키려했지만, 오히려 나와 같은 꿈을 가진 수많은 사람들이 모인것이 신기해 이런 저런 구경을 하느라 시험을 보러왔다는 생각을 잠시 잊을 수 있었다.

수험번호가 불리고 대기홀에서 벗어나 시험장으로 향했다. 시험장엔 약 40여명 정도가 열명씩 구분지어 자리했는데, 환한곳에서 보니 다들 더 잘생겨보였다. 심사관이 이런 지원자들 꾸러미에서 어떤 기준으로 카메라테스트 합격자를 가려내는 지 궁금해졌다. 다수가 떨어지고 소수가 붙는다면, 남들이 하는대로 하면 안됐다. 내가 속한 조가 시험장 안으로 들어갔을 때 앞선 조의 테스트 장면을 볼 수 있었는데 내가 심사관이 돼서 그들을 평가해봤다. 

대본이 평이해서 문단의 첫 문장을 일부러 외었다. 가능한 카메라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고 심사관의 얼굴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문득 TV속에 내 얼굴이 어떤 표정일까, 호감이 가는 표정을 하고 있는지 궁금해졌으나 그곳에선 어찌할 수 없는 일이었다. 평소에 카메라를 그윽하게 쳐다보는 연습을 하겠다고 다짐하고, 힘차게 읽고 내려왔다. 마지막에 미소를 지으려했으나 온몸이 떨려와 썩소를 지었다. 그 순간에 긴장이 몰려올 지 미처몰랐다. 

그렇게 끝이 났다. 시험은 내가 배운 한도내에서 나를 평가했으며, 그것보다 더 많은 걸 요구하지 않았다. 뭐가 문제인지 어떻게 해야하는지 모르겠지만 가까스로 한 걸음을 뗀 것 같아 후련하다. 이제 시작했으니 완주를 목표로 열심히 달리는 수밖에 없다. 이젠 내 앞길을 꿈으로만 남겨두지 않겠다는 의지가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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