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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럽지 않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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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의 갈무리가 필요한 때다. 기억에 남아있던 못다한 일들, 못다한 말들, 못이룬 계획들까지 하나씩 끄집어내 말끔하게 정리해야할 때다. 그게 청소이고 새로운 시작이며, 나를 적어내려온 책을 정리할 하나의 방점이다. 한손으론 이미 지난 페이지를 잡고 있으면서 다음을 읽어 나간다는 것은 얼마나 정신사나운 일이고 힘든일인가.

기형도의 시처럼 그동안 나는 마음속에 많은 집을 지어왔다. 매일 모양을 바꿔가며 새로운 꿈을 담아내던 그 시절의 짓다만 집들. 돌아보니 그곳은 혼자 숨기에만 좋을법한 빈집으로 남아있다. 이제는 차갑게 식은 그곳에 불을 피우고 칠이 벗겨진 그곳에 새 도색을 하고 이름표를 붙여 내집답게 꾸며야겠다. 부끄럽지 않기 위해.

무작정 집으로 내려온 지 1년이 되어간다. 그동안 내 고향인 원주에서 이뤄지는 희망의 운동, 사회적 협동운동의 현장을 보고 일하며 지역을 살리는 일에 함께했다. 지역사회의 각 일터에서 활동하는 많은 사람을 만나면서도 내가 하는 이 일이 내 꿈이라고 말할 수 없었지만, 내가 희망하는 모습을 그려나가는 고향 선배들의 발자취에서 자부심을 느낀다.  

그들의 모습에서 길을 찾았나보다. 나는 비영리 기관의 능력있는 실무자가 되겠노라고 다짐하며 달력에 그 해 치뤄지는 일년치 자격증 일정을 모두 적어놨다. 내 고향이 내가 없으면 안되는 그런 곳이 된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혼자 상상하며 뜨거운 충성심을 품었더랬다. 매일 새벽 뿜어내는 입김만큼 행복하다고 생각하며 웃음을 나누던 배달사원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문득 또 언젠간 비우고 말 새집을 짓고 있는 건 아닐까 두려워졌다. 예전과 마찬가지로 책장을 덮지 않고 다른 책을 집어들어 어느하나 추억하지 못하고 숫자로 기억되는 경험들 처럼, 어느날 말도 없이 사라질 꿈이 두려웠다. 평생을 걸고 묵묵히 걷고 있는 활동가들 앞에서 부끄럽지 않기 위해 일을 그만두기로 했다. 일단 대학교부터 졸업하기로 했다. 

내게 졸업장은 의미없다고 생각했다. 아니, 아무런 준비없이 대학교를 졸업하기는 두려웠다. 사실 학업에 최선을 다할 수 있을 때 복학하겠다고 무작정 휴학한 터였다. 지난 시간을 떠올려보면 항상 시행착오를 전제로 한 도전이었다. 그래서인지 어느것 하나 제대로 실패한 적도 없고 제대로 성공한 기억도 없다. 늘 다른 꺼리를 찾아 다니느라 분주했던 기억이다. 

사표를 내고 오래된 책장을 뒤적이다 보니 그동안 잊지도 못하고 있던 꽤나 많은 다짐들이 하나씩 모습을 나타냈다. 태권도 사범이 되겠다고 당차게 말하던 어린 박진의 발차기 사진부터 피아노를 배우고 싶었지만 자신이 없어 드럼스틱을 잡아든 중학교 3학년 드러머 박진, 영어 하나는 제대로 하겠다며 동시통역사 홈페이지를 들낙거리던 고3 수험생의 모니터와 아나운서가 되겠다며 발음을 연습하면 녹음테이프까지...

하나씩 새로 꺼내 깨끗이 닦기로했다. 아나운서 아카데미에 등록하고 태권도 공인4단을 목표로 다시 체육관을 찾았다. 영어 단어집을 잡고 하루종일 씨름하는 것도, 계속 엉뚱한 건반을 누르지만 매일 동네 피아노교습소를 찾는 것도 내겐, 자신감과 나를 향한 믿음을 지키기 위한 집짓기다.

나의 못다 읽은 지난 페이지들과 빈집으로 무성한 마음마을로 떠난다.
그곳에 짓다만 반쪽 다짐을 완성하기 위해. 내일의 나에게 부끄럽지 않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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