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나는, 무슨일이든 글로 마무리 짓는 습관을 들이고있다. 매일 집에서 하는 일이라야 책보고 영상을 보고 남겨진 수많은 잔상들 중에서 의미가 있을 만한 것들을 골라 내는 게 전부지만, 글로 적어 내면서 그 의미가 나를 통과하게 해 보자는 것이다. 마치 진지한 의식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하지만 사실 이런 독후감은, 몇 시간 남지 않은 기사 마감 시간을 지키기 위해 문장을 짜내는 것과도 같아서 깊이 사유할 시간적 여유가 없다. 아직도 수많은 책들이 나를 기다리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의식적으로 책을 읽을 때 최대한 흠뻑 빠져들고, 글 하나를 읽고 나면 한동안 눈을 감고 숨을 가다듬으며 줄거리와 느낌을 되새긴다.
한국 문학책은 외국 책의 번역본을 읽을 때와 달리 되새기는 시간이 오래 걸린다. 극중인물이 뱉어내는 한마디 말이 가슴으로 와닿기 때문이다. 주변 어른들과도 세대차이가 크게 느껴져서 가슴이 답답할 때가 많은데, 100년을 넘게 산 주인공들이 가슴에 와닿는 이유는 무엇일까. 작가의 섬세한 표현 때문일까 아니면 그때나 지금이나 내 또래 청년들이란 하는 짓이나 생각하는 것이 별 차이 없어서일까. 이유야 어찌되었든, 대부분 1인칭 시점으로 지어진 현진건의 단편 소설에서 그의 섬세한 감정 표현을 따라 읽으면서 나도 모르게 작가가 묘사한 그대로 느낄 수 있었고, 그럴수록 오랫동안 숨을 가다듬고 앉아 있어야 했다.
작가의 마음이 드러나서인지, 아니면 시대의 요구에서인지 그의 단편집에는 그럴듯한 악역이 등장하지 않는다. <희생화>에서 '누이'를 상사병으로 죽게한 'S'나 <서투른 도적>에서 '부부'의 쌀을 훔쳐가던 '할멈'이나, 악하다고 하기엔 약하다. 요즘 드라마나 영화에서 치를 떨게하는 악한들을 많이 봐서인지 모르겠지만, 어쩌면 그 땐 세상이 좀 더 선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빈처>에서의 '아내'나 <운수 좋은 날>에서의 '남편'처럼, 물질적으로는 가난하지만 그안에 서로를 위하는 마음이 가득찬만큼 착하게 살았겠다는 생각. 물론 당시는 남존여비였던 조선이었던지라 지금의 양성 평등은 기대할 수 없었지만.
일주일동안 현진건의 착한 단편을 읽고 나니, 그 어떤 휴양지보다 따뜻한 곳에서 쉬다 온 것 같다. 돈과 욕심을 통해서는 얻을 수 없는 마음 따뜻해지는 풍족감. 메마를 수 있는 내 감정에 정(情)으로 새로운 물길을 대준 그의 단편은 분명 어떤 종류의 사랑과 가르침을 남겨주었다. 그 마음 밭에서 좀 더 인간답게 성숙한 나를 꽃피울 수 있는, 그런 운수 좋은 날이 언제쯤 찾아올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