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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무것도 물려받은 게 없다고 말했다. 훗날 성공한다면 그를 자수성가라 말할 생각이었다. 장학금을 받았으니 학교는 내가 다녔소. 내가 선택한 길을 스스로 걷고 있으니 내 인생은 내 손으로 다 일구었소. 나머지는 당신이 당연히 내게 해줘야할 의무요, 나는 받을 권리가 있소. 나는 권리가 있소.
틀렸다. 모두 다 당신의 댓가없는 선물이다. 한 번 키워보라고 정성들여 심어준 씨앗이, 당신의 보이지 않는 한숨 한 모금과 눈물 한 방울, 변함없는 따뜻함으로 이만큼 자랐더라. 부족하다고 채워지지 않았다고 여긴 그 여백에, 흘림체로 가득 쓰여진 순백의 그 무엇이 나를 빈틈없이 채색하고 있더라.
많은 사람들을 만난다. 내게 호감을 보이기도 하고 신뢰를 보내기도 하는 사람들. 당연한 호의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그들의 시야에 들어오는 모습은 내가 만든 게 아니다. 사람들이 나를 믿게하는 재주가 내 안에 있다고 믿었다. 인상과 목소리는 내가 가진 장점이라고 믿었다. 아무것도 모르고 말이다.
나는 빚진 사람이다. 신뢰감을 주는 만큼 갚아야 할 빚이 쌓여간다는 걸, 기대를 받으면 그만큼 이루어야 한다는 걸. 물려받은 게 빚밖에 없다는 걸 이제야 알았다. 부활절이다. 며칠 전 선물로 받은 성경책에 한 구절이 또 내 무릎을 꺽는다. 나는 복음에 빚진자. 그래, 나는 또 빚진 사람이다.
오랜만에 집이다. 내 책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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