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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동안 앓았다. 그 사이 장마가 지나가고, 열대야도 못느낄 만큼 고단한 밤이 계속되었다. 나는 꿈을 꾼 것도 같고, 눈을 뜬 것도 같았다. 설익은 눈을 감고, 어른의 눈을 뜨기 바라며 분주하게 뛰어다녔다. 웃어대었다. 외로워했다. 며칠 간은 울기도 하였다.
그 사이 누군가는 나를 더욱 신뢰하기 시작했고, 누군가는 내게서 더욱 멀어지기 시작했다. 잡으려 달려든 것들은 하나 둘 씩 손가락 사이로 빠져 나가고, 억지로 밀어내려던 것들 만이 그대로 나를 감싸안았다. 이제, 받아들이니 더이상 무겁지가 않다. 삶의 무게는 그렇게 중력없이 내 위에 올라선다.
처음으로 맞춤양복을 입었다. 생일이라며 사회생활 선배가 맞춰 준 선물이다. 내 멋에 입던 폭 좁은 바지를 벗고, 앞 주름이 잡힌 정장을 입는다. 맘에 들었는 지 며칠 동안 갈아입지도 않다가, 출근 길에 만난 세탁소 주인에게 바지만 맡기고 돌아왔다. 이제는 단벌 신사가 아니다.
내게 맞춰야할 것도 있고, 내가 맞춰가야할 것도 있다. 어렵지만 보람있는 것, 시키니까 억지로 하는 것, 가능성이 있는 것, 우연이지만 인연처럼 보이는 것, 지금 밖에 없다고 여겨지는 것, 먼 훗날에도 그곳에 있으리라 믿어지는 것들이 중력없이 내 위에 올라서서 나를 감싸 안는다. 나는 몸을 굽히고 다시 내 시를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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