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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영화 감상문

마흔에 읽은 헤르만 헤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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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매년 연말이면 결산을 하듯 정리하는 시간을 갖는다. 이직을 하고 2년이 지나 마흔이 되었다. 나와 가정, 회사와 사회생활에서 균형을 잡는 건 쉽지 않다. 물이 가득 찬 냄비를 머리에 이고 걷고 뛰는 모습이다. 한쪽이 흘러넘칠 때쯤 다른 쪽으로 발을 내딛는다. 앞으로 가고 있다는 믿음에 흠뻑 젖은 모습 따위 개의치 않는다.

 

2.
어디쯤 왔는지, 어디까지 달릴 수 있는지, 이 방향이 맞는지 고민은 점점 어려워진다. 지금을 어떻게 살아내느냐가 중요하다는 건 알겠다. 내가 중요한 일을 하는 게 중요하지 않다. 나와 주변을 중요하게 여겼느냐에 무게축이 옮겨간다. 남는 것과 남기는 것에 미련을 두지 않게 된다. 어떤 환경을 물려주느냐에 관심을 갖게 된다.

 

3.

제대로 부딪혀 본 적 없는데 벌써 종점이 보이는 것 같다. 함부로 움직일 수 없는 상황인 줄 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앞으로 더 짧은 시간이 지나면 하산을 준비해야 한다. 길을 오가며 마주치는 인생을 바라보게 되고 지금의 셈법으로 계산한다. 행복한가, 만족스러운가, 무엇을 이뤄야 하는가라는 물음이 머릿속에 울린다.

 

4.

마흔이 되고 헤르만 헤세를 읽었다. 여러권을 읽었지만 독후감은 한 곳에 적어 둔다.


[유리알 유희]

마지막 몇 장을 남기고 진통제 두 알을 먹었다. 논문과 같은 서문은 몇 페이지 넘기지 못하고 유희 명인의 전기를 읽었다. 그의 유고는 다음으로 미뤘다. 작품 해설을 먼저 읽었다면 정리된 관점으로 읽었을 것이다. 저자가 의도한 많은 의미를 깨우치기 어려웠다. 묘사와 스토리만으로도 벅찼다.


수도원은 익숙하고 다른 소설의 주인공이 떠올랐다. 하지만 등장인물의 사색에는 지천명을 훌쩍 넘긴 저자의 완숙한 지혜가 담겨 있었다. 학생들은 미처 내가 생각해 보지 못한 성숙함을 품고 있고 어른은 어떤 초월적 존재 같았다. 저자와 대화하기에 나의 어린 나이와 편협한 세계관이 아쉬웠다.

 

지난 반 년 동안 헤르만 헤세의 소설을 읽기로 작정하고 마지막으로 잡은 책이다. 10년간 집필한 책을 단숨에 읽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촘촘하지 못한 채망위로 쏟아지듯 문자들이 읽혀 들어왔다. 성숙하지 못해 시린 곳을 덮어주는 진통제 같았다. 이만하면 충분하다. 마흔도 반년이 지나간다.


[클링조어의 마지막 여름]

표지에 옮겨진 그림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다 작품 해설을 보고서야 알았다. 저자는 그림 그리는 자아를 탄생시켜 예술가의 길지 않은 삶을 적었다. 친절하고 유려한 글이 아니었다면 결코 이해할 수 없었을 화가의 세계를 읽고 내게 아직 그림은 오지 않았다는 걸 알았다.

 

나는 며칠 전 마치 앓던 이가 빠진 것처럼, 박혔던 가시가 뽑혀 나온 것처럼 마음이 편해졌다. 갑자기 찾아온 평안은 세상과의 단절에 기대서 있었다. 나를 지킬 안전장치 하나 없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모르겠다. 호흡하듯 감정을 읽고 적어내는 연습이 나를 바라보게 했다.

 

클링조어의 자화상에는 무수한 그의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어느 것 하나 그의 것이 아닌 게 없었다. 내게도 그런 모습이 있다. 어색하지만 내 것이 아닌 게 없고, 싫다고 버릴 수 있는 게 없다. 나는 그리지 못하지만 들여다보고 솔직하게 마주했다. 그리고 가볍게 손을 잡았다.


[크눌프]

작중에 크눌프는 40대다. 폐결핵에 걸렸고, 눈밭에서 눈을 감는다. 평생을 떠돌아다녔는데 아마 어떤 인연으로부터 튕겨 나온 것 같았다. 고독했지만 그는 늘 머문 곳에 어떤 즐거움을 남겨놓았다. 혼자였지만 자연을 사랑하고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았지만 가장 풍성한 것을 지니고 있었다.

 

나는 고독에 희망하던 터였다. 고독은 훌륭한 기둥이고, 그 공간에 아름다운 것들이 번져들어올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다지 행복하지 않다. 고독은 패션이 아니다. 입었다 벗을 수 없는, 한 번 들어오면 빠져나갈 수 없는 늪과 같다. 고독을 찬미하다 그것에 의존하게 된다.

 

헤세의 마음을 조금 알 것 같다. 어딘가에 분신을 만들어 자기가 살아보지 못한 방식으로 살게 해 보는 것을 일탈이라고 나무랄 수는 없을 것이다. 벗어나지 못하는 것을 알고, 삶을 경계까지 몰아넣지 않고 풍성하게 존재할 수 있다니. 나는 그동안 너무 진지하게만 살아온 것 같다.


[황야의 이리]

코로나에 걸렸다.  약에 몽롱한 시간 동안 쉼 없이 읽었다. 불안정한 호흡으로 몇십 장씩 훑어 내려갔고 흐름을 놓칠세라 밤낮없이 들여다봤다. 하리 할러의 수기도 그랬다. 머릿속에 있는 걸 모두 꺼내놔야 직성이 풀릴 것처럼 쉼 없이 내뱉었다.  약에 취해야 읽을 수 있는 책이었다.

 

나의 40대를 물어보려 했는데 열 살쯤 많은 아저씨가 너도 그러다 미치는 수가 있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지금 힘들다는 핑계로 많은 시도를 할 수 있겠지만 그래도 중요한 걸 잊지는 말라고 타이르는 것 같았다. 글쎄, 미리 쓴 자서전 같고 내 수많은 자아로 한 판 장기 놀이를 벌인 것 같았다.

 

유머를 해봐야겠다. 종종 나를 비웃게 되더라도 나는 좀 웃어야겠다. 춤을 배우지는 않겠으나 무게를 줄이는 방법을 찾아야겠다. 한때는 화사했지만 이제는 떨어뜨려야 하는 꽃잎들을 세어봐야겠다. 그럼에도 내게 남은 줄기 같은 고독에 고마워하며 아껴야겠다. 그러나 매일 마주하는 우연에 최선을 다해야겠다.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500쪽이 채 안 되는 한 권의 책에 빼곡하게 담긴 인물들이 마치 한 사람 같다. 이름과 개성이 다른 여러 삶이 교차되지만 내 안에 있는 모순과 비교할 것은 아니다.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고 다시 첫 장을 펴니 그것도 나쁘지 않았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살다가 사라지는 흐름과 맞닿는 것 같았다.

 

그 흐름 안에서 사고와 감정이라는 평행선 위에 두 인물이 만나고 헤어진다. 나르치스는 감정으로 살아낸 골드문트를 사랑하게 된다. 끝이 보이지 않는 방황에서 돌아온  골드문트 역시 생의 마지막에서 자신을 받아들인다. "여행에서 돌아와 집에 와보니 이렇게 근사한 녀석이 되어 있을 줄이야!"

 

나는 그런 근사한 모습을 상상해 본 적이 없다. 주어진 일과에 파묻혀 살아내기에 나를 떠넘긴 건 아닐까. 나를 찾겠다고 멈춰 서서 이런저런 시도를 통해 발견한 다른 사람들의 모습을 위로로 삼고 있지는 않은가. 결국 다 마르지 못한 장작처럼 매캐한 연기만 내며 불꽃을 내지 못하는 건 아닐까.

 

그런 무거운 가슴으로 이 책을 읽었다. 비록 이 둘은 처음에는 너무 어렸고 나중에는 너무 빨리 늙어버려 마흔을 어떻게 보냈는지 알 수 없었지만, 나와 닮은 마음으로 살아내는 모습이 위안을 주었다. 나는 이 새로운 친구들의 세상을 조금 더 알고 싶어졌다. 독일어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싯다르타]

헤르만 헤세가 좋아졌다. 싯다르타의 입에서 나오는 그의 말에, 말하지 않은 것들에 가슴이 저리고 또 시원해졌다. 알고 싶고 이루고 싶은 것을 찾으려 읽지 않고 느끼고 공감하고 싶었다. 이 책을 읽기 위해 나는 고독감에 빠져있었고 많은 실수를 쌓아온 것은 아닌지 되돌아봤다. 이제야 읽을 수 있는 책을 만났다.

 

책을 펴고 있는 동안은 믿을 만한 가이드를 손에 쥔 기분이고, 홀로 걷는 동행자와 함께한 기분이었지만, 마지막 책장을 덮고 보니 내 밖에 어느 하나  달라진 것은 없었다. 쉼 없이 이해하고 공감했지만 내 모습도 이전과 그대로다. 아직 가야 할 길이 멀고 나는 긴 시간을 감당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과거와 지금, 미래의 나의 모든 모습이 한순간에 존재할 수 있다는 말을 들으니, 어디서부터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찾을 필요가 없을 것 같다. 사랑할 것을 사랑하고, 기쁨과 고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라고. 지난날 내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알 수 없다. 지금의 그것도 지나고 나면 기억에 남지 않겠지만 그것도 나쁘지 않다.


[데미안]

마흔이 되는 해, 처음 며칠은 속이 울렁거릴 정도로 불안했다. 분명 어제, 지난주 아니 지난달에서 딱 그만큼의 시간이 지났는데, 어떤 중력의 힘으로 흘러온 시간보다 더 멀리 내던져진 기분이었다. 복잡했다. 혼란스러웠다. 그러다 갑자기 [데미안]을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인공이 생각하는 많은 문구가 나를 위로했다. 내면의 나를 찾아가는 여정 내내 응원했다. 솔직해서, 흔들려서 좋았다. 애써 무감하게 나이 든 나는 그들보다 어렸다. 지난 며칠간의 혼돈은 이 책을 읽기 위한 준비과정이었고, 가라앉은 것들을 들쑤셔 탁해진 마음이어야 비로소 싱클레어의 독백이 이해됐다.

 

작가가 마흔에 적은 글이고, 전쟁 중에 던진 위로였다. 나는 헤르만 헤세를 잘 모르지만, 그도 마흔을 어떤 고독으로 꼬박 채워나갔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내게로 이르는 길'만은 그리 외롭지 않다고 말하는 듯하다. 시간을 달리하는 그와 나의 '투쟁'은, 그래도 한 번 해볼 만해 보였다.


[수레바퀴 아래서]

헤세 연보를 보니 작가가 아직 서른이 되기 전에 적어낸 자서전 격의 소설이다. 여린 소년의 마음결을 세심하게 마찰하며 써낸 문장이 마치 현악기를 연주하는 것 같았다. 자기 울림 만으로 공간을 채우는 한스 한 사람의 고백이 처연했고, 그를 이해하지 못하는 청중의 우둔한 감각이 원망스러웠다.

 

하늘은 푸른데 행복한 공간은 자주 등장하지 않았다. 낚시광이 될 수도 있었는데, 어쩌면 예술로 승화할 수도 있었던 고독한 감수성은 아직 여린 탓에 세상의 풀무질에 강물이 되어 흘러갔다. 한스의 마지막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그 모습으로 어떻게 살아나갈지 불안한 궁금증을 품고 지켜봤는데.

 

나는 한 사람을 알기 위해 무던히 문장을 읽어냈다. 처음부터 끝까지 변함없는 모습이라 응원도 했다. 적어도 변덕이 없고 말을 바꾸는 사람이 아니라 좋았다. 어쩌다 나의 모습을 비춰볼 수 있는 장면이라도 나오면 과하게 몰입하기도 했다. 그런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이 한 편으로 위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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