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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 한톨로 맺어지는 농사꾼과 아이들 -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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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눈이 내린 22일 오후, 원주 생활협동조합과 도정공장 사이 읍내 논가 곳곳에는 유기비료 포대들이 쌓여있었다. 아직은 논이 텅 비어 있지만 이곳에서 자라는 나락은 원주 아이들의 맛있는 밥이 될 것이다.

원주 친환경급식지원센터는 읍면 단위 22개 초등학교, 8개 중학교, 40개 어린이집, 상지대학교 등에 지역 친환경 쌀 '해울미'를 공급하고 있다. 학교들은 친환경 쌀을 급식에 쓰는 데 필요한 차액을 원주시에서 지원받는다.

학교로 들어가는 쌀은 배달 바로 전날 도정공장에서 깎아낸다. 22일 오후에는 74명 어린이가 다니는 만종초등학교에 한 포대가 들어갔다. 이 학교 백선희 영양교사는 "도정된 지 얼마 안된 쌀이라서 아무래도 질이 우수하다"고 평가했다.

그러면 다른 식자재는 어떨까? 국산 쓰기에도 바쁜 게 현실이다. 그는 "채소나 야채처럼 생으로 먹는 음식은 소독을 해도 걱정스럽다"고 전했다. 맛은 신경 쓴 지 오래 됐고 안전이 급선무다. 나물을 무칠 때 넣는 파·마늘도 볶아서 쓰고 후식으로 나가는 포도도 알알이 따서 비벼 씻는다. 친환경무상급식이 이뤄진다면 이같은 고충도 사라질 것이다.

                   ▲ 22일 오후 원주 친환경급식지원센터 직원이 만종초등학교에 친환경 쌀 '해울미'를 배달하고 있다.
                   ⓒ 권박효원

                   ▲ 원주 생활협동조합 창고에 쌓인 생명농업 쌀.
                   ⓒ 권박효원

맛보다 안전... 국산 쓰기도 바쁜 학교 급식

원주 친환경급식지원센터는 이미 지난 2008년 2월 예비 사회적 기업으로 선정돼 학교급식사업을 시작했다. 지난해 9월에는 유기농 식당 '행복한 달팽이', 결식아동에게 친환경 반찬을 제공하는 '행복을 나누는 도시락'으로 사업을 확장했다.

40년 넘는 전통의 '협동조합운동의 메카'답게 원주 친환경급식센터는 지역단체 12곳이 결성한 협동사회경제네트워크에 기반을 두고 있다. 그 지향점은 '로컬푸드'다.

지역 내에서 생산-유통-소비가 이뤄지면서 경제가 선순환되고, 생산자와 소비자의 관계도 재구성된다는 것이 로컬푸드의 기본 개념이다. 전국 농사꾼들이 서울만 바라보고 농사짓는 현재의 구조를 바꾸고 풀뿌리·생태 중심으로 돌아가자는 것이다.

로컬푸드 운동은 공공적 성격의 학교급식과 딱 맞아떨어진다. 일단 생산자인 농부는 공급량을 미리 예측해 농사를 지을 수 있다. 농수산물의 안정적 수요는 농부들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 중 하나다.

친환경 농사꾼인 이완용 원주생협 이사장은 "수매가 제대로 되지 않던 초기에는 재고가 쌓여서 조합원들이 일반 쌀 가격(80㎏ 기준 16만원)으로 친환경 쌀(21만원)을 사들였다"고 회상했다.

오뉴월 땡볕 아래 끝없이 피를 뽑아가며 농사를 짓지만 친환경 쌀의 수확량은 일반 쌀의 80% 수준이다. 이완용 이사장은 "생산 과잉으로 일반 쌀값이 하도 떨어져 친환경 쌀도 가격을 더 올릴 수가 없다"고 말했다.

학교 급식으로 판로가 생기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다음해 급식 수요가 나오면 생협 회원들이 쌀 공급량을 분담해 농사를 짓는다. 2008년 한해 55톤이었던 친환경쌀 생산은 학교급식이 시작되면서 2009년 155톤으로 훌쩍 뛰었다. 친환경 쌀 학교급식이 아이들 뿐 아니라 농사꾼들도 지원하게 된 셈이다.

소비자인 아이들은 안전한 쌀을 먹을 뿐 아니라 바른 식습관을 익히고 생태 감수성도 기를 수 있다.

이 곳 초등학생들은 급식 시간에만 친환경 쌀을 접하는 게 아니다. 체험프로그램을 통해 직접 모심기도 하고 단오제도 본다. 화학비료와 농약이 사라진 원주의 논에는 메뚜기가 돌아왔다.

부모들이 "농부 아저씨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쌀 한 톨이라도 남기지 말라"고 가르칠 때, 아이들은 논에서 만났던 '농부 아저씨'의 얼굴을 떠올릴 수 있다. 농부들 역시 이름 모를 불특정 다수를 생각하며 농사를 지을 때와는 마음가짐이 달라졌다고, 이 이사장은 말했다.

이렇게 지역 주민들이 서로 알고 지내는 유통은 로컬푸드의 중요한 특징이다.

감자도 과일도 급식하고 싶지만...

그러나 아직 원주에서조차 학교급식에는 친환경 쌀밖에 들어가지 못한다. 야채·과일 등의 식자재는 대량 유통과 공급이 까다롭다. 그때그때 필요한 양을 신선하게 저장하고 빠르게 배송해야 한다. 흙을 떨어내고 잔뿌리를 없애는 등의 전처리 시설도 필요하다. 두부나 장류 같은 식품은 가공과정도 있어야 한다.

이 때문에 계약 재배가 쉽지 않고 초기 투자비용도 많이 들어간다. 각 생협 단위는 물론 예비 사회적 기업 차원에서도 감당하기 어려운 사업이다. 조세훈 원주 친환경급식센터 사무국장은 "쌀 다음에는 친환경 감자나 과일도 공급하고 싶다"면서도 "당장 전국적으로 친환경무상급식을 실시하기는 어렵다, 시설과 체계 등 인프라 구축이 우선"이라고 말했다.

그는 최근의 '친환경무상급식' 여론에 대해서도 우려를 나타냈다. 자칫 충분한 고민이나 논의 없이 '소비자에게 저렴하고 질 좋은 급식을 제공한다'는 개념으로만 자리잡는다면 생산자인 농부가 소외될 수 있다는 지적이다.

실제로 일부 생협들이 학교 친환경급식에 경쟁 입찰을 하면서 친환경 쌀값이 일반 쌀값 수준으로 떨어진 적이 있었다고 한다. 친환경급식이 전국적으로 확대되면서 대형유통업체가 저가경쟁에 나선다면, 소비자에게는 기쁜 소식이지만 적정한 값을 받지 못하는 농부들에게는 억울한 일이다. 지역 경제에도 도움 될 리가 없다.

조 사무국장은 "소비자들의 '유기농 보신주의'와 유통업체의 '상업적 친환경'이 만난다면 상당히 위험한 결과를 낳을 수 있다"고 말했다. 생태와 공정거래, 지역경제에 대한 철학이 바탕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 원주만 하더라도 지자체 정책 방향을 '친환경 로컬푸드'로 잡는 것이 쉽지만은 않았다. 학교급식지원조례가 만들어진 것은 지난 2005년이지만, 당시 지원은 친환경 쌀이 아닌 이 지역 브랜드 쌀인 '토토미'를 공급하는 방식이었다.

다시 공무원들은 로컬푸드를 '원주특산품을 수도권에 공급하자'는 정반대의 개념으로 오해했고, 심지어 유전자조작식품을 특산물로 개발하자는 주장까지 나왔다고 한다.

"유기농 보신주의+상업적 친환경? 철학이 필요하다"

수년간 시행착오를 겪었던 원주시는 오는 2012년 새로운 도전에 나선다. 지자체 차원에서 '원주로컬푸드종합지원센터'를 세우는 것이다.

이 곳에서 식자재의 인증·검수·가공, 식단 및 교육 프로그램 개발 등이 이뤄진다면 친환경무상급식의 꿈도 좀더 현실에 가까워질 것이다. 친환경급식지원센터는 사무국 역할을 하면서 실질적으로 시스템을 운영하게 된다.

이 모델은 시민사회단체 주장과도 일치한다. 친환경무상급식연대는 오는 29일 '광역 및 기초 단위 로컬푸트지원센터 설치', '지역사회 참여형 로컬푸드·급식위원회 구성' 등의 정책을 지자체장·교육감 후보들에게 공식 제안할 예정이다.

'지역급식 선구자' 원주의 사례는 여러 가지 면에서 다른 지자체에게도 리트머스 시험지가 될 것으로 보인다. 이번 선거를 계기로 원주의 실험이 전국으로 번져나갈 수 있을지 두고 볼 일이다.

                   ▲ 원주 친환경급식지원센터 '행복을 나누는 도시락' 직원들이 결식 아동에게 전달할 반찬을 포장하고 있다.
                   ⓒ 김도균

출처 : 쌀 한톨로 맺어지는 농사꾼과 아이들 -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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