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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영화 감상문

내가 누구인지 말해준 책, 무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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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글은 쓰여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빛을 잃는가 하면, 어떤 글은 세상에 제 말을 들려준 날부터 오늘날까지 독자의 마음에서 항상 새로운 빛을 내는 책이 있다. 그 목록은 개인마다 다를테지만 흔히 동서양의 양서들로 분류된 책들이 공통될 것이다. 몇 해 전부터 벼르던 우리글로 된 소설읽기에 드디어 첫 발을 내민 것이 춘원 이광수의 <무정>이다. 매사에 첫술에 배부를 리 없다고 하지만 이 책을 읽고 나니 몸과 마음이 풍족해지는 것이, 때론 통하지 않는 옛말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먼 훗날 내 기억을 돕기 위해 등장인물과 줄거리를 요약을 하자면, 한국이 조선이던 시절, 그러니까 부산에서 신의주까지 뻗은 철로가 아직 닿아있어 하루 몇 차례씩 근대화의 욕망을 가득 실은 기차가 달리던 그 때, 이형식, 박영채, 신우선, 김선형, 김병욱이라는 청년들과 그 외 몇몇 주변인물이 살던 세상에서 서로가 각자 운명에 순응하기도 하고 개척하기도 하다가 결국 몽매한 조선의 사람들을 깨우기 위해 살기로 뜻을 모으고 머지않아 조선의 대들보가 된다는 얘기다.

하지만 ‘교훈적이다’ 하고 짧게 줄일 수 있는 이 책을, 책장을 넘기다 말고 내 ‘속사람’을 들여다보느라 한참동안 읽기를 멈추게 한 것은, 끊임없이 내 속을 들여다보며 내가 누구인지 말해주는 것 같은 작가의 투시력이었다. 실제로 책의 첫머리에 걸려있는 둥근테 안경을 쓴 작가의 초상은 내가 글을 읽는 내내 ‘봐라 너의 마음이 그들 중 누구와 다르고, 누구를 나쁘다 욕할 수 있느냐’고 묻는 듯 했다.

내게 ‘너도 그토록 무정하지 않느냐’고 추궁하는 것 같았다. 내 걸음을 막는 모든 방해물은 쉽게 잊거나 용납하며, 지난 일은 앞날의 밝은 일에 비하면 보잘 것 없다고 여기는 내게 영채의 섧 가득한 토로와 형식의 자책하는 괴로움을 통해 말하는 듯했다. 또 ‘우리 모두가 그렇게 무정하다’고 일깨워주는 것도 같았는데, 그때마다 나는 책장을 덮고 한국인이 왜 이렇게도 무정하게 앞만 보고 달려야했는지를 생각해 보았다.

더 나은 앞날을 향한 욕망을 가득 싣고, 그 것을 태우고, 그 것을 뿜어내며 앞으로 달린 것이다. 후진은 생각할 수도 없고, 좌우로 방향을 바꾸기는커녕 가만히 서있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는 선로 위를 말 그대로 직진해 온 것이다. 이미 지나친 것은 새로 올 것에 떠밀려 기억되지 않은 채 그렇게 달려온 것이다. 앞길엔 미국식 또는 일본식의 선진문물이 ‘우리 땅을 아름답게 해주리라’는 믿음을 품고.

한동안 손에서 놓지 못하던 마지막장을 덮으며 이 책의 초판이 인쇄된 날자를 확인해 보았다. 1917년 1월부터 6월까지, 거칠게 어림잡아 백년을 사이에 두고 저자의 눈이 ‘나’와 ‘우리’의 ‘속사람’을 응시한다.

내 ‘속사람’을 들여다 본 그는 아직도 내가 ‘깨지 못했다’고 한다. 여러 인생을 보여주고선 그들 중에 내가 있되, 지금 존재하는 나를 위해 그곳에 그려놓았다고 한다. 내가 보았듯이 그들 중 누구도 삶의 정답은 될 수 없지만, 모두들 그렇게 살고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가능한 한 정답게 살라고 한다. 춘원 이광수는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우리에게는 무어라고 말할까. 다시 한 번, ‘기쁜 웃음과 만세의 부르짖음으로 지나간 세상을 조상하는 <무정>을 마치자‘고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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